1.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권위가 필요했음
그래서 신을 통해 건국의 명분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국 신화를 가짐
2.
백발백중. 한번에 사슴을 잡는 활솜씨로
부여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모두 주몽을 시기함
이 모든 일은 어머니 유화에게 털어놓으며
주몽은 부여를 떠나기로 결심함
마굿간에서 일하던 주몽은 좋은 말을 골라
말의 혀에 바늘을 꽂아 둠
바늘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말은 비쩍 마르게 되었고
금와왕은 그 말을 주몽에게 줌
……………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주몽이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듦
졸본 땅에 이르러 주몽은 초막을 짓고 나라를 세우니
그 이름을 고구려라 함
3.
중국도 천자라고 지칭을 하는데
중국의 천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사람이고,
고구려는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으로
개념의 차이가 있음
4.
주몽이라는 이름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이 있음
5.
부여는 기본적으로 평야지대로 살기에는 매우 적합한 나라임
5부족 연맹체로 다섯개의 부족이 연맹해서 살았는데
당시 한나라 때 토착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였다고 함
2 ~ 3 세기의 부여는 동북아시아 초강대국으로서
만주 평야 일대를 자리매김하고 있었음
6.
부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부여를 세운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신화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
7.
부여의 시조는 동명왕.
고구려의 시조 또한 동명(성)왕 임
동명이라는 말은 부여족 전체 시조로 위대함을 상징함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도 주몽을 동명이라 불렀을 것이라 추측됨
8.
부여 동명왕의 신화와 고구려 주몽 신화는
똑같다고 해도 될정도로 이야기 구성이 매우 유사함
그러면 부여의 동명 신화가 먼저인가? 고구려 주몽 신화가 먼저인가?
순서로 따지면 당연히 부여의 동명 신화가 먼저임
즉, 고구려 주몽 신화는 부여의 동명 신화를 그대로 가져 온 것임
9.
그렇다면 왜 굳이 부여 동명 신화를 차용했을까?
신화는 단순히 건국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어떠한 정통성을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음
따라서 고구려는 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부여의 동명 신화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음
10.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에 작성되어 신빙성이 높은 자료임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임
또한,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은 주몽의 혈통에서 비롯 되었기 때문임을 알리기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첫머리에 주몽 신화를 새김
11.
신라, 백제의 금석문에는 건국신화의 흔적이 없음
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고 하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자부심을 알 수 있음
*금석문 : 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씨 또는 그림
12.
주몽 신화는 12세기 고려시대에 다시 부활하게 됨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고구려 주몽 신화를 엮은 한시로
총 1,410자에 달하는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남기게 되는데
고려 중기까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쓸 때 까지만 하더라도
신라 중심의 역사 계승의식이 강했음
고려 후기로 오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이 상당히 강화되고
주몽 신화를 통해 그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부각시키면서
다시 한번 주몽 신화가 우리 민족에게 깊이 각인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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